CEO 히틀러와 처칠

히틀러와 처칠은 끈기 있게 비전을 추구한 끝에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비전의 제시는 리더십의 절대 요소이다. 특히 히틀러와 처칠처럼 지도자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비전을 지켰을 경우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지도자는 대중이 진심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당시 처칠의 비전은 문명화된 가치 위에 강력한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에 비해 히틀러의 비전은 비현실적이고 사악했지만 그 시대 독일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공격 대상을 주입시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전쟁의 당위성을 얻었다.


히틀러는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려 했고 끊임없이 완전무결한 초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가꾸며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을 인정받게 되었다. 


“히틀러의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의 원동력은 권력욕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지도자가 국민들을 감화시키는 데 있어 반드시 카리스마나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를 만난 독일 국민들은 ‘그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처칠을 만난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진정한 영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카리스마를 능가하는 법이다”


히틀러는 정치나 행정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전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부하들끼리 꾸려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아랫사람들 간에 경쟁을 부추겨 적대적 파벌 사이에서 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저절로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수병들의 업무까지 관심을 갖고 참견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처칠의 부하나 동료들은 그의 에너지와 강한 실천력을 따랐다. 처칠의 정력적인 리더십은 그의 결점과 실수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히틀러와 처칠은 전쟁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총리 취임 초기부터 약 3년간 야전 사령관들의 지휘권까지도 빈번히 침범했던 처칠은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은 몽고메리 같은 의지가 강한 장군들의 설득으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반대로 히틀러는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개전 초기 독일군을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던 ‘임무형 전술’(권한 부여)의 원칙마저 부정하고, 야전 사령관의 지휘권을 간섭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히틀러는 사령관 각자의 주도적인 지휘권이 초기의 승리를 이룩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갔다. 그와 반대로 처칠은 영국군이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깨달았다.


처칠은 육군 원수 앨런브룩과 전략상 문제로 인해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의 의견이 앨런브룩과 달라도 그를 결코 권력으로 제압하지 않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탓에, 자신의 충동적인 천재성보다는 앨런브룩의 논리적인 주장을 믿고 따르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산적인 긴장 관계는 처칠의 천재성과 앨런브룩의 열정이 결합된 위대한 군사 작전을 통해 영국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쌍두마차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 유약한 인물 대신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앉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처칠이 전략상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보좌하는 사람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덕택이었다. 처칠은 앨런브룩의 의견이 자신과 다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그 점이 바로 처칠이 위대한 이유이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적합하지 않은 인재는 과감히 제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처칠은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무자비하게 대했다.

 

예컨대 처칠은 총리가 되자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인 밥 부드비를 식품부 차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부드비가 추문에 연루되자 처칠은 옛 친구를 불명예 퇴진시켰다. 개인적인 친분보다 정부의 입장을 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히틀러는 처신에 문제가 있어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놀랄 만큼 관용을 베풀었다. 경호대장 부루노 게세는 알코올 중독자인데다가, 수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히틀러와 고락을 함께한 유일한 옛 동지라는 점 때문에 용케도 문책 한번 당하지 않고 전쟁이 종결되기 4개월 전까지도 총통 경호대장으로 자리했다.

 

공군 수장 헤르만 괴링 역시 막중한 직책을 맡기에는 능력 밖의 인물이었다.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격 미달자는 해임해야 마땅 하지만 히틀러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는 관료로서의 전문성이나 도덕성보다는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더 중요했다. 히틀러가 지도자로서 실패한 이유는 충성심 하나만 보고 부적격자를 측근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우수한 사령관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도 처칠은 순순히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저서 ‘나의 반생’에서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술회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비난의 돌을 던졌다.

 

아마 내가 그 돌을 맞아도 잘 견뎌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와 반대로 히틀러는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 이유를 끊임없이 남의 탓으로 돌렸다. 히틀러는 먼저 자신의 천재성을 무시하는 장군들 그리고 독일 국민 전체에 책임을 전가했다. 그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문서에 직접 서명하거나 지시하는 일이 없이 대부분 비서를 통해 처리했다.

 

이런 극단적인 차이는 처칠이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폭격 맞은 런던 거리를 활보했던 데 비해 히틀러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사례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히틀러가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전남투데이 조은별 기자 | Andrew Roberts 저/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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