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개방적 교육

 

 

 작가 ‘톰 슐먼’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책에서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자아발전을 주는 교사 ‘존 키팅’의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교육적 태도를 기술하였다. 


키팅은 학교의 전통, 명예, 규율등 최고로 여기는 가치보다는 신입생들의 자유, 이상, 희망, 용기를 키우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파격적이고 엉뚱한 이단자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에게 친구처럼 다가서는 그의 용기야말로 신선한 바람처럼 여겨졌다.


학생들은 개성이나 적성이 다른 만큼 저마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현실처럼 학생들의 개성보다 일류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두가 뛰어가는 상황과는 달리, 휘파람을 불며 교실 앞문을 들어오고, 곧 뒷문으로 빠져나가더니 돌아서서 모든 학생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키팅 교사의 모습은 마치 개구쟁이가 친구들에게 놀러가자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는 어찌 보면 학생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그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는 교사이다.

 

주변의 교사나 행정가가 학교의 전통을 깨트리는 행위는 하지 말라고 경고 했지만 소신과 자신감에 찬 그는 인간 심성 도약의 당위성을 먼저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 그의 영원한 희망이요, 야망이었다.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때 미래의 소중함도 안다는 믿음이었을까! 학생들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학생들에게 마음의 벽을 허물게 했고 그들의 걸음걸이와 학습에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학생은 교사의 아랫사람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니다. 학생이 잘못하거나 비행을 저질렀을 때 권유로부터 나오는 매질과 훈계를 일삼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즘 아이들은 PC방을 자주 들락거린다. 사실 이들에겐 친구가 없다. 가까운 부모나 교사들은 자신들을 비난하기 때문에 얼굴도 모른 사람과 채팅을 통해 지루함을 달래고 자기를 인정받기를 원한다. 수업시간에도 핸드폰을 켜놓고 수다스럽게 이야기하고 교사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방향성 잃은 이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택하는 가엾은 청소년까지 생겼다. 슬픈 현실이다.


키팅은 못될지라도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포용하는 교사가 되어보자. 그러면 그들은 가정환경이나 사회 환경 따위로 인한 자살과 가출의 유혹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재미있고 뜻 깊은 시절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강요하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성실히 임하려 할 것이다.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한다. 문학자 ‘아나톨 프랑스’와 그의 제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면 포용적인 교사가 학생들의 재능을 얼마나 살려 주는지를 보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문학적 천재란 명문가나 노력가, 창조가도 아니고 유행과 습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하루는 그에게 젊은 시인이 찾아왔다.


“선생님, 제가 드린 시집을 읽어보셨나요?”
“응, 밤새 재미있게 읽었어. 다 읽을 때까지 잠들 수 없던걸.”
“농담하시는 건 아니구요?”
“내가 건성으로 듣기 좋으라고 말하는 줄 아나 본데 자네 시집에서 제일 좋은 곳은 84페이지일세, 이래도 내가 안 읽었다고 할 텐가?”
“아이구! 선생님, 죄송합니다.”
햇병아리 시인은 큰 용기를 얻어 돌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정말 그 사람의 시집을 다 읽으셨습니까?”
“허참! 자네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선생님은 두어 페이지도 안 읽으셨잖아요?”
“음! 사실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어.”
“그런데 왜 84페이지가 가장 훌륭하다고 하셨습니까?”
“여보게 어느 페이지든 상관있는 줄 알아? 시인이란 자기 시는 어느 것이나 걸작이라고 믿는거란 말일세.”


‘아나톨 프랑스’는 젊은 시인에게 희망과 기대를 주었다. 이처럼 교사는 학생들의 행위나 말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교사는 자기의 틀에 학생의 사고를 가두기보다는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로 용기를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의 기를 살리고 그들의 독창성이나 모험을 용인하며, 긍정적인 자극을 제공할 수 있을 때 변화와 생기가 감도는 교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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