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현실의 경계 ‘멀티버스’

우리 삶은 허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은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 경제, 국가와 같은 구체적인 문화와 제도까지도 지어진 이야기라 표현한다. 물론 신화나 설화같은 이 이야기들은 비록 허구지만, 우리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이야기가 가진 상호 주관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허구들은 실제 이를 현실로 오해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최초의 근대 소설로 이야기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탐닉한 나머지 모험을 떠나게 되며, 풍차를 괴물로 착각해 돌진한다. 


오늘날 서부극이나 킬러 이야기, 스파이물에 빠져 이를 현실로 생각하는 이가 총기를 소유한다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물론 소설의 세계에서는 막상 그런 이들이 일상에서 예상치 않게 발생한 사건도 별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을 뒤섞는 것은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며, 이는 아마도 소설이 가진 가장 큰 힘이자 위험일 것이다.


과학소설(SF)의 이야기들은 이 시대 가장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과학을 기반으로 하기에 더 위험한 측면이 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며, 사람들을 더 쉽게 매혹시킨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에 차용된 시간 여행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얽매인 존재이다. 매 순간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다시 선택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의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 있는 주제였고,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적절한 과학 이론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때 우리는 이에 열광하게 된다.


과학소설이 사용하는 가설이 실제 과학에서도 논쟁적인 주제일 때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개념 중에 ‘멀티버스’가 있다. 


멀티버스는 마블의 영화 등 최근 여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를 석권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 자체로 멀티버스에 대한 영화이다. 특히 멀티버스는 시간 여행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이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는 이야기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문제는 현실에서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멀티버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속한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고,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생각이긴 하다. 그러나 지난 수백만 년 동안 현실에 만족한 이들보다 만족하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 본능은 인간이 가진 중요한 능력 중 하나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의 근원이기도 하다.


물론 현실을 모델링하고 그 모델을 수정하는 능력인 상상력은 인간 지성의 근본이며, 오늘날의 문명을 만들어낸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는 사람들에겐 ‘멀티버스 개념’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를 준 셈이 된것이다.


멀티버스를 실제로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하는 과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대 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를 진지한 과학적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유는 이론이 실험으로 반증될 가능성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인 테드 창의 단편소설집 <숨>의 마지막 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바로 이 멀티버스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이라는 개념을 파고들며 비유한 표현이기도 한 이 소설에는 다른 멀티버스와 통신할 수 있는 프리즘이라는 기계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던 다른 선택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궁금해하며, 더 나은 삶을 사는 다른 세상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질투하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들은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세계의 나는 바로 지금 이 세계를 만든 나의 선택의 결과 만들어진 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내게는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의무가 있으며, 프리즘은 바로 그 의무에 도움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언론인이며 예술가인 S.I 로젠바움은 지난달 뉴욕타임스 오피니언란에 기고한 ‘멀티버스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내 삶을 망가뜨렸나’라는 글을 통해, 현실을 비유적이든, 실제로든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사람을 이야기하며, 멀티버스 개념이 그들의 문제를 더 키울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는 말미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 내가 만지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나의 초점을 두는 버전을 믿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도래하고 있지만 오해하지 말자.


다른 타임라인에 맹목적인 집착은 일어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고 내가 나 자신에게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위험성이 있다.


소설은 이야기이고 멀티버스의 나는 가상의 나 일뿐, 과학적 편리와 심리적 긍정을 제외하고는 지나친 환상을 경계해야 하며 지금 이 세계의 바위, 꽃, 풀포기 하나하나가 더 큰 의미이고 이 순간이 내게 가장 중요하다는 삶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편저 : I Fantasized About Multiple Timelines, and It Nearly Ruined, MyLife 
by S.I Rosenbaum 
조은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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