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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ㅡ 1930년대 일제강점기 전시동원체제 1ㅡ

 

 


1930년 대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다시 세계정세가 요동쳤던 시대였습니다.

1918년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 참화를 딛고 각 국이 회복의 길을 걷은지 10년 조금 지났습니다.

느닷없이 1929년에 찾아온,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곧 바로 전 세계로까지 퍼졌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넓은 식민지를 활용해 블록 경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후발국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미국,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결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주변 국가를 침략해 영토를 넓히고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탈리아도 무솔리니 파쇼정권이 들어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습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일본은 침략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를 구축하고자 한반도 공업화에 착수하기도 합니다. 또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전시동원체제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1930년대 들어 세계는 주요 강대국들이 살아 남기위해 다시 정면충돌하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1939년, 끝내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 시킵니다.

1930년 대 세계는 또다시 끔찍한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위한 준비시대 였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고 남긴 휴우증이 십 년 조금 지나 더 큰전쟁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1930년 대 조선상황은 어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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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3.1운동을 통해 무력으로만 조선인들 독립정신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문화통치를 내걸었다.

3.1운동 책임을 지고 2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사임한다. 그를 대신하여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다.

마코토 총독은 과거 ‘무단통치’를 대신하여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선인의 향상과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공언하였다.

당시 마코토 총독이 제시했던 문화통치 실제적인 내용은 ‘행정상 형식주의 타파, 조선인의 민의 수용, 조선인의 임용상 차별 철폐, 조선의 전통 존중, 지방자치제도 실시’로 요약된다.

일제는 관제를 개혁하여 총독 임용 범위를 확대하고 경찰제도를 개정하며, 일반 교원과 공무원의 복제를 폐지하여 식민지 조선 사회 군사적 분위기를 탈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일제는 해방까지 단 한 차례도 문관 총독을 임명하지 않았다. 헌병경찰이 보통경찰로 전환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찰 수는 3배 이상 증가시켰다.

일제는 끊임없이 명목적인 ‘자치론’을 제기하여 다수 조선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변질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 일제 이런 기만적 문화통치정책에 제대로 발 맞추어 이광수 '민족개조론'이 나왔다.

이광수는 1922년〈개벽〉5월호에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한민족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을 즐겨 나타내고 신의·충성이 없고, 일에 용기 없고, 빈궁하는 등 악점투성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성의 개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광수 논리는 당시 일제 식민통치 원인을 우리 민족성에서 찾는 것이었다.

나라 잃은 원인을 조선 오백년동안 양반사대부들에게 엄청난 핍박 받으면서도 나라가 위기였을 때는 불같이 일어났던 우리 민초들 잘못으로 돌리려는 이광수 논리는 기가막히다 못해 해괴했다.

당시 우물안 개구리 같았던 조선사대부들 잘못으로 나라를 잃어놓고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 떠 맡기는 꼴이었다.

곡학아세 전형을 이광수가 솔선수범 먼저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해괴한 이광수 논리가 먹혀 들어 간다. 당시 친일로 변절한 지식인들에게 변명거리로는 최고 명분있는 논리였다. 그들은 앞 다투어 이광수 논리 따라하기를 했다.

문제는 그런 지식인들이 당시 대부분이라고 할만큼 너무 많았다.

이 시대에 대부분 조선상층세력들은 친일로 변절한다. 특히 지식인들인 예술가들 변절이 아주 심했다.

1920년 대 초기 봉오동 청산리 전투 처럼 대대적인 무력독립투쟁도 갈수록 사그라 들었다.

몇 개있는 언론도 이 지식인들 주장만 써 주었다.

그러다보니 사회분위기가 당연히 이광수 주장 쪽으로 흘렀다.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광수 부류 지식인들 현란한 글과 말에 현혹되기 시작했다.

지난 고 김수환 추기경이 부르짖은 '내 탓이요!' 가 당시에도 유행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1930년 대 조선청년 대부분은 일제에 동화하고 출세하는 것이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박정희와 백선엽이다.

이 둘 만이 아닌 거의 대부분 조선 청년들이 그랬다.

사실 당시 상황으로는 이런 조선청년들을 탓 할 일은 아니다.

이들은 나라 잃은데는 아무 책임없다. 일제강점기 시절 1910년 대 태어났다. 1920년 문화통치시절 일제에 의한 초중 교육을 받았다. 당시 이광수나 최린 최남선 등 조선에서 뛰어난 지식인으로 알아주는 이들에게 '민족개조론' 같은 세뇌를 받고 자랐다. 그게 진실인줄 알았다. 일제강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이들이 가야할 길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돈을 벌거나 출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오백년동안 짓 눌러왔던 신분적 제약이 사라졌다. 자기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시 나라면 어떻했을까?

능력부족을 탓 하기는 했겠지만 능력만 있다면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이런 말은 친일논쟁에서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당시 현실이고 사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뭉뚱거려 친일파라는 말을 쓰지 말고 '친일민족반역매국노' 들 하고는 구분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이 말에도 조금 어긋남이 있어 찝찝하기는 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반대로 나라를 찾기위해 자신을 희생한 젋은 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이봉창 등 당시 젋은 독립투사들이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 존경을 넘어 경외스럽다.

이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당시 출세를 위해 뛰었던 많은 조선청년들을 이해해준다고 해도 일본인들보다 더 악질적으로 독립투사를 잡기위해 설치고 다니고 험한 고문을 자행한 이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를 지나차 일에 대해서는 민족정기를 위해서라도 구분해서 봐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세력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본의 이런 민족분열정책은 성공했던 것이다.

1920년 대 기만적 문화통치 조차도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세계대공황 돌파구를 찾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침략에 나서면서부터는 조선에 대해 무단적인 억압통치로 다시 변환 시킨다.

1930년 대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설정해 조선 내의 모든 자원을 강제로 끌어내는 전시총동원 체제를 구축했다.

일제 전시동원체제를 돕기위해 1930년대 이후 함경도지방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전되긴 했다. 그러나 그 공업화는 자본·기술·경영체제가 일본인에 집중되고 핵심적 생산재 공업이 빠진 산업화였다.

농촌은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일본의 식량, 원료 공급지로 재편되었다. 비옥한 토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소유하고 농민들은 단순한 소작농이나 영세농민으로 전락하여 기본적인 생활에 위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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