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호남선, 국민은 아무 열차도 탑승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 첫 예산안의 통과가 불투명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 제출로 냉각된 정국에 법인세 인하, 지역 화폐 예산 증액, 대통령실 예산 삭감 등의 사안을 놓고 여야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도 예산안은 법정 처리 기한인 12월 2일을 넘었지만,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헌법 54조에 따르면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 여야는 정기국회 시작부터 싸우기 시작해 마지막 날까지 극한 대립을 이어갔다. 결국, 내년도 예산안은 정기국회 내 처리되지 못했다. 


2014년 국회 선진화법이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이러한 ‘늦장 예산안’ 처리를 바로잡기 위해 국회는 2014년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했다. 


국회선진화법은 11월 30일까지 예산안 심사가 완료되지 않을 때 정부의 예산안을 본회의에 자동 부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 8월 30일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새 사령탑에 오른 이재명 대표는 전화로 “이른 시일 안에 만날 자리를 만들어보자”라고 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초당적 협력’을 부탁했고, 이 대표는 “윤 대통령께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덕담했다. 


안타깝게도 허니문은 정기국회 시작과 함께 끝났다. 정기국회 첫날인 9월 1일 이 대표가 최측근인 김현지 보좌관으로부터 받은 텔레그램 메시지가 공개됐다. 


김 보좌관은 이 대표에게 검찰의 출석요구서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전쟁입니다”라고 적었다. 이후 정부·부산행과 호남선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목적지만 바라보며 내달렸다. 야당은 이 대표 등 야권 인사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를 ‘야당 탄압’이라고 반발했고, 여권은 범죄 혐의에 대한 정당한 수사일 뿐이라며 민주당의 모든 행위를 ‘이재명 방탄’으로 몰아세웠다. 


민주당은 ‘김건희 특검법’을 발의하며 맞불을 놨고, 국민의 힘은 이 대표 최 측근(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정 진상 전 당 대표자 정무조정실장) 구속을 고리로 공세 수위를 끌어올렸다. 그 와중에 윤 대통령의 영국·미국 순방 ‘비속어 논란’으로 여야는 거세게 충돌했다. 


민주당은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그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서 단독 처리했고, 윤 대통령은 ‘수용 거부’ 견해를 밝혔다. 여야 간 갈등은 민주당이 지난 11일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면서 정점을 찍은 분위기다. 


국민의 힘은 해임건의안 처리를 이유로 지난달 하순 우여곡절 끝에 합의한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보이콧까지 검토 중이다. 


대통령실은 3개월도 안 돼 또 올라온 장관 해임건의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실에서 이 장관 해임건의안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는 것은 어떤 입장을 내놓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쯤 되면 여권도 야당도 서로를 정치의 ‘파트너’로 여길 생각이 아예 없어 보인다. 국민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렇게 사생결단하듯 싸우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여도 야도 자신의 지지층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여당과 야당이 무엇을 하든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30%대 안팎의 지지층만 의식하다 보니 숨어 있는 ‘진짜 민심’은 읽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국민의 힘의 핼러윈 참사 국정조사 특위 복귀를 촉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참사 유가족협의회도 1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역 없는 국정조사와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가까스로 예산안을 처리한 뒤 여야 합의로 국정조사를 시작하더라도 국정조사 기간 연장, 조사 대상기관 추가, 증인채택 문제 등으로 국정조사가 파행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여야는 지난달 23일 국정조사 기간을 11월 24일부터 45일간으로 하되 본회의 의결로 연장할 수 있도록 합의했지만, 민주당이 이미 이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단독으로 표결로 처리한 상황에서 국민의 힘이 순순히 활동 연장에 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예산안을 두고 여야의 신경전이 이어지자 민주당은 단독으로 예산안을 처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재명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초부자 감세가 아닌 국민 감세를 해나가겠다”며 “다수당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자세로 협상이 합의되지 않으면 민주당의 독자적인 안을 제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단독으로 예산안을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당과 야당의 첨예한 대립 속에 국민은 경부선 열차나 호남선 열차 아무 열차에도 탑승하지 못했지만 두 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폭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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