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인 ‘권력 앞의 사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김건희 씨에게 징역 1년 8개월과 추징금 1,281만5천원을 선고하며 통일교 금품수수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명태균 여론조사 무상 제공, 두 사건은 줄줄이 무죄가 됐다. 세상을 뒤흔든 이른바 ‘V0 김건희’ 사건의 실체는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샤넬백과 사치품 치장’에 갇힌 쟁점의 축소판이다.


재판부는 “권력자든, 힘 없는 자든 예외와 차별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판결문이 보여준 건 ‘권력 앞의 형식적 평등’이었다. 특검이 구형한 징역 15년과 벌금 20억 원, 9억4천여 만원의 추징은 1년 8개월 실형과 1천여 만원 추징으로 바뀌었다.

 

죄의 무게와 형량의 균형이 무너진 자리에서, 사법 정의는 법정 언어 속에서만 생존을 허락받은 신기루에 가깝다. “이게 재판인가”라는 물음시민사회단체들은 “작정하고 봐주겠다는 의도가 너무 분명한 판결”이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주가 조작 판결은“증거 부족이 아니라, 유죄를 판단할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진다. 법정은 증거와 법리를 말하지만, 국민은 상식과 경험으로 판단한다. 상식으로 보면 기막히고, 경험으로 보면 낯익은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번 판결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씨는 동시에 실형을 선고받은 첫 전직 대통령 부부가 됐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부끄러움이지만, 정작 법정은 이 사건을 ‘영부인의 치장’ 수준으로 축소한 채 휘장을 내렸다.


국민이 묻는 것은 샤넬백의 가격표가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사익을 위해 공적 권한을 농단했는가 하는 국가의 근본 문제다. 이미 죽어 있던 사법, 드러난 시신“사법부는 이미 죽었다”는 자조는 오래전부터 누적돼 왔다.


정치적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기소와 불기소, 피의자에 따라 뒤집히는 구속영장, 사건의 성격보다 정권의 이해에 민감한 수사와 재판이 반복될수록 법원과 검찰은 신뢰 대신 냉소를 거두어 왔다. 이번 판결은 그 죽음에 또 하나의 부검 기록을 덧붙였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이번 판결을 “김건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검찰의 봐주기 수사와 사법부의 면죄부가 겹쳐진 구조적 참사”라고 진단한다. 윤석열 정권기 검찰의 부실·선택적 수사가 오늘의 판결로 이어졌다는 비판, 따라서 검찰개혁이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지적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사법의 관을 짊어진 것은 재판부지만, 그 관을 짜 올린 목재는 검찰과 권력, 그리고 그들을 방치한 정치의 몫이다. 항소심은 ‘사법 사망진단서’를 찢을 수 있는가특검은 “법리적으로는 물론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며 항소를 예고했다. 시민사회 역시 “이번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항소심에서 주가조작과 공천 개입 의혹의 실체를 반드시 가려야 한다고 요구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지금 한 사회의 법감정, 그리고 사법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신뢰의 조각과 마주서게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은 한 영부인의 유죄·무죄를 넘어, “이 나라에서 권력자에게도 법은 같은 속도로, 같은 무게로 적용되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던진다. 그 물음에 또다시 눈을 감는다면, “사법은 죽었다”는 탄식은 곧 “공화국은 끝났다”는 선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항소심 법정이 사법부의 사망선고에 도장을 찍을 것인지,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인지, 지금 국민은 그 판결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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