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뉴스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ㅡ 3·1 운동과 그 날 이후 3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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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노래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초중고시절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도 옥의 티가 여러 개 있습니다.

사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1919년) 한반도의 인구는 이천 만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라는 가사로 불린 삼일절 노래는 분명한 오류입니다.

또 삼월 일일 정오가 아니라 오후 두시를 넘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그 이후 만세운동을 벌어 졌습니다.

그리고 삼월 일일 그 날은 태극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주최측에서도 태극기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올린 사진에도 태극기 든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낸 문제 답입니다. ^^)

학생들이 비밀리에 나가야 했으므로 태극기를 들고 다니다 보면 일경에 걸릴 수도 있어서 3.1 당일 날은 일부러 태극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후 운동에는 태극기를 준비하여 나누어 주면서 운동을 벌여 갔습니다.

또한 그 날은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었습니다.

이 처럼 우리가 3.1절 기념식때 부른 노래가 옥의 티를 넘어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요즈음 전국 초중고생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 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합니다.

큰일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3·1절의 의미를 얼마나 알까요?

그저 대한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해서 유관순 열사가 만세를 부르던 날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님 고등학교 시절 배우고 시험에도 자주 나온 최남선이 썼다는 독립선언서 내용으로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보죠!

저는 지금까지 조선 오백년에 관한 역사 글을 쓰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반 백성들을 위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조선은 그 잘난 성리학에 빠진 조선사대부, 그들만을 위한 나라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고혈을 빨아먹는 압제대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한일합방이 된지 10년이 채 못되어 사대부만을 위한 그런 나라가 뭣이 좋다고 삼일절 노래가사 처럼 온 일반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벌였을까요?

정말 사대부만을 위했던 조선으로 다시 돌아 가자고 일반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운동을 벌였을까요?

그러한 것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3.1 운동 후 조선왕조를 부정한 '대한민국 임시민주정부' 가 탄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수 천년간 내려 온 몹쓸 신분제가 겉으로나마 철폐된 것은 갑오경장 때 일제에 의해서 입니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정권을 누가 잡던지 수 천 년간 내려 온 신분제 철벽을 깨 부셔준 정부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겉으로만 그랬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 후에 친일민족반역매국노들만 챙겼고 일반백성은 무단통치로 조선말기 못지 않게 더 압박을 가 했습니다.

만에 하나 일제가 겉으로 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신분제를 완전 철폐하고 백성들을 위한 조선을 진정한 근대시민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때도 3.1운동이 가능했을까요?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런 수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완벽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도 온갖 지저분한 방법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식민지 정책을 펴 우리 일반 백성들에게 조선사대부들이 했던 것보다 더 심한 굴욕과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더욱이 일제는 통치를 쉽게하기위해 일반 백성들 고혈을 빨아 먹던 조선사대부들 대부분과 손을 잡았습니다.

일제가 겉으로는 갑오개혁을 강제로 시행해 신분제를 철폐했지만 속으로는 일제 36년 내내 양반들을 우대하면서 신분제를 유지 시켰습니다.

조선사대부들 중 고위관료는 친일매국 댓가로 일본의 귀족칭호를 받았으며 일반 양반들도 가진 토지 대부분 인정 받아 대지주라는 명목으로 조선시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뼈속까지 사대주의자들인 이런 조선사대부들은 사대대상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일제에 빌 붙어서 호의호식 합니다.

나는 솔직히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제보다 백성들 고혈만 빨아 먹다 나라도 빼앗기고 또 빼앗긴 나라에서 빼앗간 놈들에게 빌붙어서 자기들만 호의호식하며 지냈던 친일민족반역매국노들이 일제보다 훨씬 더 밉고 증오스럽습니다.

3.1 운동 당시도 이들은 조선독립이라는 말에 코웃음치며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3.1 운동이 진압된 후에 신문기고문을 통해 3.1 운동을 야만적인 폭동이며 3.1 운동에 참여한 민중을 폭도로 매도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군사독재정권이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민주화투쟁을 폭도로 호도한 것은 일제한테 그대로 배운 것들 입니다.)

그리고 또 양반사대부 거의 대부분은 해방될 때까지 일제보호 아래 호의호식하며 지냅니다.

3.1 운동 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우리 일반 백성들 뿐 이었습니다.

그럼 그 처참했던 피해 현장으로 들어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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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에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같은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는 수 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 갔다.

3.1 운동 시작은 일부 종교인과 지식인들이었지만 젊은 학생들에 의해 행동에 옮겨지고 한달 후에는 전국으로 번져 갔다. 급기야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졌다.

3.1 운동은 산발적이긴 했지만 1년이 넘도록 진행 되었다.

3.1 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계층은 지식인도 학생도 아닌 농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제에 의해 직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어 혹심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직접 저항운동에 참가한 것이다. 그래서 3.1운동을 다른 한 편으로 독립만세운동 겸 농민들의 민란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갑작스런 3.1운동에 깜짝 놀란 일본 총독부는 그들이 십 년동안 해오던 대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수없는 학살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 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경은 그 아이마저 찔러 죽였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사망자 수는 553명에 불과했다.

사망자 수만 13배의 차이가 있다.

이처럼 3 · 1 운동 겉모습은 일본의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3.1운동 의의와 정신만큼은 실패하지 않았다.

3.1운동은 일본의 가혹한 무단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 보여 주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 나라 국권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민주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 중추기관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3·1운동은 비로소 한국민족을 문화적, 역사적 민족개념에 기반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한국민족 개개인에게 뿌리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과거 일 년간 일본인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 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본인 최대 문제는 이 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의 무기는 이 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하고 안창호가 임시정부수립 당시 연설했다.

이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세력들에게 3·1운동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적절히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래는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라는 글이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정말 열여덟 먹은 여린 소녀가 저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유관순열사 당시 사진 속 모습을 보면 그 의연하고도 당찬 표정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3.1 운동을 유관순 열사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3.1 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을 했던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아직 다 밝혀지지 않고는 있지만 올해 8.15광복절에 서훈을 추서받은 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아래 시진 참고. 김경화,박양순,성혜자(뒷줄), 소은명,안옥자,안희경 지사(앞줄)]

​그리고 그 여학생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민중이 200만이 넘는다. 그 중 사망자만 만 명 가까이 육박한다.

3.1 운동은 핍박받았던 조선민중들 대부분이 일제에 그리고 친일민족반역매국노들에게 항거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쉬운 것은 3.1 운동 당시 이완용 송병준 같은 친일민족반역매국노들 중 한, 두 명이라도 본보기로 처단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이다

손병희가 이완용, 박영효에게 민족대표로 나서주라고 부탁하고 다녔을 정도니 그들을 처단 하는 것은 언불생심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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