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전협정과 유엔군 참전의 날을 기념하며

인천보훈지청 복지과 김해권



“본 정전협정의 일체 내용은 1953년 7월 27일 22:00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중공군, 북한군 대표가 판문점에서 모여 이루어진 휴전회담 제159차 본회의에서 합의한 총 5개조 63항의 정전협정서 내용 중 제63항의 일부이다.

다가오는 7월 27일은 67주년을 맞는 정전협정일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6.·25전쟁 발발 이후 초기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던 북한군의 기세는 무서웠으나 유엔군 참전에 이은 중공군의 참전 등으로 전황이 지지부진해지며 양측 모두 피해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이후 회담은 2년에 걸쳐 이어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제159차 본 회의에서 유엔군, 중공군, 북한군 대표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은 전쟁이라는 비극에 고통받는 가운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허덕임과 몸부림을 바탕으로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전쟁 초기의 중대한 시기에 주한 미국 대사의 남침사실 보고(한국시간 25일 오전 10시)로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연합군 파병 결의(28일)까지의 모든 절차가 단 3일여 만에 이루어진 것, 연합군 파병 결의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한 것, 북한군이 전쟁 초반에 파죽지세로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하고 이후 3일간을 서울에서 지체한 것, 그리고 이후 유엔 회원국들의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이어졌기에 전쟁 초반에 너무 늦지 않게 연합군의 병력 등 지원에 힘입어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정전협정에 이르게 되었다.

 

개전 이후 정전협정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수많은 사건들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역학관계 등이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유엔 회원국들의 인도주의적인 도움은 어떤 이유로든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병력을 지원한 나라들로는 미국, 영국 등으로부터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총 16개국이 있었고, 의료 지원을 했던 나라는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의 5개국, 물자 지원국은 과테말라, 헝가리 등 39개국, 전후복구 지원국은 리히텐슈타인, 스페인 등 7개국이었다. 당시 전체 국가 수가 총93개였던 것을 감안하면 전세계의 2/3가 넘는 국가들이 방법은 다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6.·25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 군과 국민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음은 당연하나 유엔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세계 여러 나라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결과는 추측하기 어렵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세대들은 대부분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다시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었던 세계 각국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국가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에 합당한 인도주의적인 책임과 역할을 당당히 담당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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