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오직 나에게 개구리가 없는 것이 인생에 한이로구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6.1지방선거)가 끝나고 석 달여가 지나고 있지만, 여야 가릴 것 없이 이전투구(尼戰鬪구)로 민생은 도탄(塗炭)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수확기 때부터 시작된 쌀값 대폭락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올 수확기를 앞둔 농민들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방 정가(政街) 역시 아무도 관심이 없다. 특히 농도 전남의 도백이나 의회는 그 흔하디 흔한 건의문이나, 결의서 하나도 내지 않고 있다. 불과 석 달 전 치열했던 선거 열기에 비(比)할 바는 아니지만, 전국 쌀생산량, 재배면적, 농가 수에서 수위(首位)를 다투는 농도 전남의 상황은 참담할 지경인데도 폭풍 전야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좀 생뚱맞은 이야기 일진 모르지만 지난 지방선거에서 치열하게 도전했던 여러 후보들 중에 다음 이야기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 고려 의종 때, 당대를 대표하는 ‘동국이상국집’을 집필한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의 일화를 통해 흔히들 일본말로 알고 있는 ‘와이루’의 본 말뜻을 통해 일 천년 전(前)이나 민주공화국 21세기 우리들의 정치 자화상을 뒤돌아 보고자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 18대 왕 의종(毅宗) 즉위 초부터 이자겸의 전횡과 묘청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문신세력이 득세하며, 마침내 무인정변(武人政變)의 계기가 되었을 만큼 정치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의 일화이다.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僥倖)히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자고 청(請)을 했지만,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주막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 집(이규보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주모가 이르기를 ”그는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궁금증이 발동(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임금은 집주인에게 면담(面談)을 신청(申請)했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 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내기를 청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시합을 하자”는 거였는데, “백로(白鷺)를 심판(審判)으로 하여 노래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 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試合)에 응(應)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반면 노래시합을 제안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 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한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白鷺)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白鷺)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로가 제일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 되어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라는 글을 대문 앞에 붙혀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선생이 임금한테 부정과 불법(不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당시 세태(世態)를 비유(比喩)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 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蛙:개구리 와, 利:이로울 이, 鷺:백로 로./백로가 좋아하는 개구리)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白鷺)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럼 뒷 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에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李奎報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自身)도 과거(科擧)에 여러 번 낙방(落榜)하고 전국(全國)을 유랑하는 과객인데, 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 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宮闕)에 돌아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命)하였다고 한다.

 

과거(科擧)날, 이규보 선생도 과장(科場)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시험준비(準備)를 하고 있을 때, 시제관(試題官)이 내 걸은 시제(試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 이란 여덟 글자였다고 한다.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차후 시대를 풍미한 대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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